다녀왔어요

(경상) 안동 도산옛길(2)_농암종택

풍요한 2017. 10. 1. 19:00

170923

 

농암종택은 낙동강 상류 청량산 자락,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자리하고 있는 농암 이현보의 종택이다.

농암종택이 본래  자리했던 도산서원 앞 분천마을은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이후 영천이씨 문중의 종손 이성원씨가 1996년 이곳에 터를 잡고 10여년 동안 안동의 이곳저곳으로 이전되어 있던 종택과 사당, 긍구당(肯構堂)을 한곳으로 옮겨 놓았다2007년에 분강서원(汾江書院)이 재이건되었으며, 지금은 분강촌(汾江村)이라고도 불리며, 일반인들에게 종택을 개방하였다.

'가송리'는 그 이름처럼佳松-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 산촌과 강촌의 전경을 한꺼번에 만끽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마을이다

명산 청량산과 더불어 가송리의 협곡을 끼고 흐르는 낙동강은 낙동강 700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마을 앞에는 강과 단애, 그리고 은빛 모래사장의 강변이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어, 이른바 '도산9'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 1498(연산군 4)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과 예문관봉교 등을 역임하였고, 1504(연산군 10) 사간원정언이 되어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논하다가 안동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사헌부지평에 복직되었고, 형조참판과 호조참판을 거쳐 1542(중종 37)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시를 지으며 일생을 보냈다. 조선시대의 자연을 읊은 대표적인 작가로 국문학 역사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저서로 『농암집』이 있고,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농암은 뒷모습이 아름다운 선비로, 조선 시대 유일하게 은퇴식을 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임금은 금포와 금서대를 하사했고, 퇴계 이황은 전별시를 지어 선물했다. 한강까지 이어진 행차를 보고 도성 백성들이 담장처럼 둘러섰다고 한다. 농암이 고향으로 돌아와 강각에서 읊은 시가어부가. 농암은 부모님을 공경하며 자연에서 유유자적 지내고 싶어, 임금의 계속되는 상경 명령에도 끝내 응하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종일품 숭정대부의 품계를 내려 예우했다. 명예를 포기하여 더 큰 명예를 얻은 셈이다.

 

 

 

농암종택 건물배치도

농암종택 대문채




 

왼쪽 별채, 가운데 긍구당, 오른쪽 사랑채

사랑채




긍구당. 긍구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 가겠다"는 뜻



 


명농당



명농당 보고 이제 분강서원으로 갑니다

 

분강서원. 1699년 후손과 사림이 농암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이른바 조선시대 사립대학.


유도문(정문)

강당(홍교당)

 

서재(경서재) . 교무실겸 선생님 방이다.

동재(극복재). 학생 기숙사

농암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분강서원의 사당

한속정사. 행정실이다.

농암 신도비. 농암 묘소 앞에 있던 것을 이리로 옮겨 놓은 것이라 한다.

 

강각과 애일당

 

농암 각자


강각

 

 

애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