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어요

(경상) 안동 도산옛길(1)_도산서원

풍요한 2017. 10. 1. 17:00

170923

 

서원은 존현(尊賢)과 강학(講學)이라는 기능에 의해 공간구성·배치수법이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다. 즉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사당, 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인 강당,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는 공간인 동재(東齋서재(西齋)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러한 중심건물 외에도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이를 보관하는 서고, 서원의 관리 및 유생들의 식사준비 등 생활전반을 뒷받침해주는 교직사(校直舍), 제사에 필요한 그릇을 보관하는 제기고(祭器庫)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택지는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에 따라 적당한 위치를 선택했는데 거의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릉지가 많다. 남쪽에서부터 정문·강당·사당을 일직선상에 두고 그 양쪽에 동재와 서재를 배치했다. 사당에는 따로 담장을 쌓고 내삼문(內三門)을 만들어 통행하도록 했다. 교직사는 강당 서쪽에 따로 담을 쌓아 배치하고, 제기고는 사당 앞 옆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과 동 · 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선조 8)에 한석봉이 쓴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본산이 되었다. 1615(광해군 7) 사림이 조목(趙穆)을 종향(從享)했다. 1792(정조 16) 정조 임금이 치제(致祭)를 내리고 도산별과(陶山別科)를 시행하였다. 1796(정조 20) 시사단 (試士壇)을 세우고, 1819(순조 19) 장서고(藏書庫)인 동광명실(東光明室)을 건립하였다. 1870(고종 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되었으며, 1930(경오년) 서광명실(西光明室)을 증건(增建)하였고 1932(임신년) 하고직사(下庫直舍)를 이건하였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 · 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Daum백과]

 

 

 

저희는 도산서원-퇴계종택-퇴게묘소-이육사 문학관를 보고 차량으로 농암종택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주차장에서 도산서원 가는 길

 

시사단

 

도산서원 입구입니다

이곳이 천원 지폐에 나오는 그 곳이라네요.

열정. 우물입니다


 

 

농운정사. 기숙사입니다.

 

 

시습재

관란헌

이제 도산서당으로 들어갑니다.


 


 

 

정우당

 

 

 

광명실. 서고입니다. 동,서편 두곳 있습니다.

 



저 진도문을 들어서면 도산서원 입니다.

도산서원. 전교당

 

 

동재. 박약재

 

서재. 홍의재

 

 

 

옥진각. 박물관입니다.


 



 

 

 



 


 

 

천연대


녹조가 보통 심각한게 아니네요..

천광운경대

이제 도산서원을 떠나 퇴계종택으로 갑니다. 퇴계종택 바로 앞에 계상서당이 있네요. 도산서당 이전에 여기서 계셨다 합니다.




 

퇴계종택




 

 




 

와송

 

 



 

퇴계선생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