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31(수)
서울특별시 사적 제257호로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운현궁은 조선조 제26대 임금인 고종의 잠저(潛邸)이며 흥선대원군의 사저이며, 한국근대사의 유적 중에서 대원군의 정치활동의 근거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흥선군 이하응이 왕실집권을 실현시킨 산실이자 집권이후 대원군의 위치에서 왕도정치로의 개혁의지를 단행한 곳이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하야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내외에 행사한 곳으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살았던 잠저(潛邸)였기 때문에 역사적 상징성이 더욱 크다. 흥선군의 사저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863년 12월 9일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부인 민씨를 부대부인으로 작호를 주는 교지가 내려진 때부터였다.
고종이 12살까지 살았던 운현궁은 철종 때 옛 관상감 터였던 운현궁에 왕기가 있다는 내용의 민요가 항간에 유행하였으며, 고종이 등극한 후 대원군이 운현궁 터를 다시 확장하였다. 운현(雲峴)이란 당시 서운관(書雲觀)이 있는 그 앞의 고개 이름이었으며, 서운관은 세조때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었으나 별호로 그대로 통용되었다. 서운관의 명칭인 운관(雲觀)과 운관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 운현(雲峴)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고종의 잠저는 당시 대왕대비 교지를 받들어 영의정 김좌근, 도승지 민치상, 기사관 박해철·김병익 등 일행이 명복(明福-고종의 이름)에게 익종의 대통을 계승토록 하기 위하여 고종을 맞이하러 최상급의 가마행렬을 갖추어 관현(觀峴)의 흥선군 사저에 갔을 때 흥선군의 위엄 있는 자세와 그의 둘째 아들인 명복의 천진스러웠던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에서 운현궁이 고종의 잠저였음을 알 수 있다.
한일강제병합 후 일제는 1912년 토지조사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재산을 몰수하여 국유화하고 이왕직 장관을 시켜서 운현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운현궁을 유지·관리하는 일은 소유권에 관계없이 이로당의 안주인들이 계속 맡아했다.
운현궁의 소유권이 다시 대원군의 후손에게 넘겨지게 된 것은 1948년 미군정청의 공문에 의해서였다. 이후 그 소유권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정부와 대원군 후손 사이에 법적 공방이 있었으나 그 해 9월 21일 결국 대원군의 5대손 이청(李淸, 1936- )씨에게 운현궁 소유권이 확정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1년 운현궁을 유지, 관리하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면서 양도 의사를 이청씨가 밝힘에 따라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되었고, 1993년 12월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이다. - 운현궁 홈페이지에서
종로에 위치한 운현궁은 3호선 안국역에 인접해 있습니다. 또는 1호선 종각역이나 종로 3가역에서 내려서 인사동 방향으로 10분정도 걸어가면 나옵니다 .
본래 흥선군의 사저였을 때 운현궁의 위치는 창덕궁과 경복궁의 중간부근으로 지금의 운현궁과 덕성여대 자리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증축하여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는 주의 담장 길이가 수리(數理)나 되고 4개의 대문이 웅장하여 마치 궁궐처럼 엄숙하였다고 하는데, 현재의 덕성여대, 舊TBC방송국, 일본문화원, 교동초등학교, 삼환기업 일대라고 합니다. 그 당시 땅은 1만 평, 현재는 2148 평인데 서울시에서 매입해서 문을 새로 짓고 기와를 갈았습니다.
부분부분 부서진 곳을 수리해서 서울시 문화재 재산으로 1997년1월부터 개관했다고 합니다.
운현궁의 대표적 건물로는 고종원년(1864) 9월에 준공한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후에 증축한 이로당이 있고, 지금은 한 개뿐이지만 그 당시 4개였던 대문이 있습니다.
운현궁 출입문
수직사. 운현궁 출입문 오른쪽에 있는 행각으로,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이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수직사 실내 모습
솟을대문.
솟을대문은 대문에 이어지는 행랑채나 담장보다 높게 대문을 세운 것으로 상류주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다. 격식과 권위를 나타내는 전통적 대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종2품 이상의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 초헌이나 가마 등의 출입이 쉽도록 대문의 높이를 담장의 높이보다 높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일반적인 와가나 흙담을 둘러친 초가에는 주로 대문의 높이를 행랑채나 담장의 높이와 같도록 만드는 평대문을 세웠다. .
집안에도 여러 개의 대문을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중문(中門)이 그것이다. 중문이라고 하지만 형식이나 역할은 대문과 다를 바 없다. 이 문은 안채와 사랑채, 주인채와 행랑채를 구분하고 연결시켜 주는 가리개와 통로의 역할을 한다
노락당(老樂堂)
운현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중심이 되는 건축물이다. 노락당에서는 고종 3년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비롯하여 회갑등의 각종 주요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노락당 남행각
노안당(老安堂) 전경
노안당은 운현궁의 사랑채로 대원군이 국정을 의논하던 곳이었으며 고종 즉위 후 대원군의 섭정기간 동안 주요 개혁정책이 논의되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또한 이곳의 영화루라는 누마루는 대원군이 손님을 접대하던 곳이다. 노안당은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으로 추녀 끝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노안당의 상량문이 1994년 5월 27일 보수공사 당시 발견되었는데 당호의 유래와 대원군의 호칭 및 지위에 관한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상량문에 의하면 대원군의 호칭을 '전하(殿下)' 다음의 존칭어인 '합하(閤下)'라고 하였으며, 지위는 모든 문무백관의 으뜸이라고 하였다.
노안당 후경
노안당이란 현판은 흥선군의 스승이기도 추사 김정희의 글자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노안당의 '노안(老安)'은 《논어》공야장(公冶長)편에 나오는 "노인들을 편안하게 하여준다(老者安之)"라고 한 글에서 인용한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되어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흡족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무량수각. 추사 김정희 글씨로 '한량없이 길이 길이 오래 살 수 있는 집'이라는 뜻으로 즉, 만수무강을 뜻합니다.
추사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 편액은 두 종류가 남아 있다. 그중 하나는 전남 해남의 대흥사(대둔사)에 있다. 대흥사 대웅전에는 조선후기의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마침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추사 김정희가 이 현판을 보게 되었다. 추사는 '저런 글도 글이라고 써서 붙였냐!' 하면서 '대웅보전과 '무량수각' 글자를 써서 초의선사에게 주며 현판을 만들어 걸도록 하였다. 그의 나이 55세 때의 일이었다.
또 한 종류의 무량수각 편액은 추사의 고향 예산 화엄사에 걸려 있다. 1846년 9월 고향 예산에 있는 화엄사 중창 기념으로 귀양지 제주도에서 써 보낸 것이다.
회갑을 맞이한 그는 예서를 바탕으로 전서와 해서를 가미한 새로운 조형미를 풍기는 글씨체를 선보이고 있었다.
대흥사 편액이 젊은 시절의 패기와 큰 야망을 담고 있어 기름지다면 화엄사의 편액은 유배생활에서 겪은 각고의 세월과 인생의 어떤 깨달음을 담고 있는 단단한 화강암의 골기(骨氣)와 같은 명상과 세련된 필치(筆致)를 느끼게 한다.
추사는 제주도 8년간의 유배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길에 대흥사에 들렸다. 그리고 초의선사에게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제자리에 다시 걸어달라고 한 후 이광사에게 사과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삶을 이끄는 그의 태도가 달라졌음을 시사한다. 그 작품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스승 추사의 글씨를 좋아한 대원군이 모각한 편액인지는 고증할 수 없으나 대흥사 무량수각 편액을 모각한 글씨인데 오히려 더 세련된 맛을 풍긴다고 한다.
金正喜, 阮堂이란 관서(款署)가 선명합니다
노안당 서행각
노안당 안채를 보고 뒷편으로 나와 바라본 정경. 처마에는 송판으로 만든 차양(遮陽)을 달았는데 처마 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단 차양은 고전적 수법이다
이로당 뒷편. (정면) 노락당 북행각, (우측) 이로당 동행각
이로당 동행각
이로당(二老堂)
운현궁의 가장 왼쪽에 위치한 건축물로서 노락당과 더불어 안채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여성들을 위한 공간으로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가 운현궁의 살림을 맡아서 하던 곳이다. 별당인 이로당은 바깥으로 출입문을 내지 않은 지극히 폐쇄적인 '口'자형 건물이다. 노락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오로지 안채에서만 드나들 수 있었던 비밀스럽고 은밀한 건물이었다.
이로당 전경. 마침 예절교육이 있는지 아이들의 단정히 놓인 신발이 묘하게 어울린다고 느껴집니다.
이로당 앞 정원. 노락당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로당 출입문
이로당을 나와서 바라본 담장
유물전시관
흥선대원군 초상
척화비.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1871년(고종8) 서양을 물리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병인양요, 신미양요등 서구열강의 통상압력에 거부정책, 즉 쇄국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경근문, 공근문
노락당 못지 않게 운현궁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4대문이었다. 한창 전성기였을 때는 정문, 후문, 경근문(敬覲門), 공근문(恭覲門)의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후문 하나만 남아 있다. 경근문은 고종이 운현궁을 출입할 때 전용하던 문으로 창덕궁과 운현궁 사이에 있었다. 공근문은 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전용한 문인데 경근문과 함께 없어지고 지금은 일본문화원 옆터에 그 기초만 남아있다 그럼 지금 매표소가 있는 이 출입국은 당시에는 후문이었나?
<옛날 옛날에... >
운현궁은 운현(雲峴), 즉 지금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사저를 말한다.
이곳은 고종의 잠저였던 곳으로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본궁이 되어 궁(宮)의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운현궁 터는 지금 현대 그룹 본사가 들어서 있는 전 휘문중고등학교 자리를 합해서 관상감(觀象監)터로 불렸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보면 운현궁에 관해서 이렇게 기록돼 있다.
관상감은 일명 서운관(書雲觀)이라고도 하는데 고종의 잠저는 서운관의 자리이며 그래서 이곳을 운현궁이라고 칭한다.
철종초에 서울 장안에는 관상감 터에서 성인이 나온다는 동요가 나돌았고 또한 운현궁에는 왕기가 서려 있다는 이야기가 있더니 얼마 안 되어서 지금의 왕인 고종이 탄생하였다. 고종이 등극한 이후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그곳을 말끔히 치워 새로이 하고 수리(數理)에 달하는 담장에는 네 개의 문을 만들었으며 대내를 장엄하게 꾸몄다.
[매천야록]에서 말하는 네 개의 문은 경관문(敬觀門).공관문(恭觀門)등을 말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아버지가 남연군(南延君)이며 남연군은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麟平大君)의 5대손에 해당된다.
그런데 남연군은 출계(出系)하여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정조의 동생인 은신구(恩信君)집에 계사(繼嗣)하였고, 은신군 역시 숙종의 왕자로서 후계가 없었던 연령군(延齡君)을 상속하였다.
연령군의 집은 숙종대로부터 대대로 안동별궁의 터였던 안국동 일대였으며 따라서 대원군의 집안은 대대로 안국동에 살았다.
그런데 고종이 즉위할 당시 대원군의 집은 안국동이 아니고 관현(觀峴)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 일가가 언제 안국동에서 관현, 즉 운현궁터로 이사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흥선군이 고종을 낳고 일 년쯤 됐을 때 청도(淸道)에 사는 관상가 박유붕(朴有鵬)이란 사람이 서울에 올라온 김에 운현궁으로 흥선군을 찾아왔다.
박유붕은 관상을 잘 보았는데 자기의 용모를 보고 한쪽 눈이 없어야 귀하게 산다고 하여 스스로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된 기인(奇人)이었다.
박유붕은 서운관 근처에 서기(瑞氣)가 서려 있다고 하며 흥선군의 아들 명복의 관상을 보게 해 달라고 청했다. 명복의 관상을 보고 난 박유붕은 이렇게 말했다.
"대감마님, 사랑 근처에 잡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 주십시오." 하더니 벌떡 일어나 명복을 안고 있는 흥선군에게 큰절을 하면서,
"대감마님께서만 알고 계십시오. 도련님께선 천일의 기상이 역연 하옵니다." 천일의 기상이란, 즉 왕을 뜻하는 것이다.
사실 흥선군은 둘째아들인 명복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왔다.
몰락한 왕족으로서 그의 가세는 매우 빈곤했다. 뿐만 아니라 철종시대의 조정을 마음대로 움직이던 세도 안동김씨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도 거리를 쏘다니면서 시정 잡배들과 놀면서 술주정꾼으로 자처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드디어 흥선군에게 대운의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철종14년(1863)12월8일,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후사의 선택은 왕실의 윗전인 대왕대비 조씨에게 달려 있었다. 세도가인 안동김씨에게 억눌려 살아온 조대비는 안동김씨를 원수처럼 생각해 온 터였다. 이날 흥선군은 운현궁 아재당(我在堂)에서 측근인 김응원(金應元)과 함께 난초을 치고 있었다.
이때 대비전 승후관(承候官) 조성하(趙成夏)가 찾아왔다.
"대원위 대감!"
흥선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대원위, 즉 대원군이란 왕의 생부를 두고 부르는 칭호가 아닌가.
바로 조금 전에 창덕궁 중희당에 모인 중신들 앞에서 조대비는,
"흥선군의 제2자 명복을 익성군(翼成君)으로 봉하고 익종대왕의 대통을 계승케 할 것이며 영중추부사 정원용(鄭元容)과 도승지 민치상(閔致庠)은 조정 백관을 거느리고
즉시 운현궁으로 나아가 흥선군에게 전지(傳旨)를 고하고 신왕을 대궐로 봉영하시오."
드디어 운현궁에는 호위영군사가 지키는 가운데 봉영대신의 일행이 당도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민씨는 새로 등극하는 아들을 대궐로 떠나보내면서 사친(私親)으로서의 마지막 정을 나누었다.
"너를 내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명복아." 민씨는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을 얼싸안았다.
"명복아 듣거라. 너는 이제 이 나라의 임금이 된다. 임금은 나라의 어른이요, 만백성의 어버이니라. 네 나이 이제 열두 살이나 그동안 이 아비가 일러 준 말도 있으니
왕도가 어떤 것이란 것은 잘 알겠지?"
"녜.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부끄럽지 않은 행동을 할 것입니다."
"그래. 이제 어머니와 아비에게 사가의 아들로서 마지막 인사를 올려라."
어린 임금이 대궐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려고 이날 운현궁에서 창덕궁 돈화문에 이르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고종이 즉위한 다음 조정에서는 살아 있는 대원군에 대한 예우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로 의논이 분분했다.
그러나 조대비는 안동김씨 일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교지를 내렸다.
"지금은 국사가 다난한 때인데 상감은 어리시고 상감을 보좌해야할 이 몸은 식견이 부족한 늙은 여자임이 한스러울 따름이오. 그러니 나라와 사직을 위하여 이 몸은
뒤로 물러앉기로 하고 대원위 대감께서 직접 상감을 협찬하시어 국사를 돌보시게 함이 옳은 줄 압니다."
상감을 도와 섭정을 맡게 된 흥선대원군이다. 이로부터 운현궁은 10년 동안 이 나라의 국정을 호령하는 터전이 된 것이다.
한편 운현궁에는 고종이 거동하기 편하도록 금위영과 운현궁 사이에 문을 트게 하고 고종 원년에는 대왕대비와 왕대비를 모시고 운현궁에 거동하여 고종의 부조(父祖)인
은신군.남연군의 사당에 참배한 일도 있었으며 고종3년에는 민비와의 가례도 이곳에서 치러졌다.
철종14년 12월에 고종이 즉위함으로 시작된 대원군의 권세는 고종10년(1873),
왕이 서무친재의 명을 내리고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등이 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림으로 해서 10년 세도의 막을 내리게 된다.
대원군 집권 10년 동안 대원군은 운현궁 아재당에 들어앉아 팔도강산에 호령을 했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서원을 철폐했고, 폐허로 있던 경복궁을 재건했으며, 서양 선교사와 수많은 천주교도를 학살했으며, 여러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도 쇄국으로 일관해 왔다.
고종10년에 정계에서 밀려난 대원군은 양주(楊州) 직곡(直谷)으로 은퇴하여 운현궁을 떠났다. 그러나 대원군은 그뒤에도 정계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았으며, 고종19년(1882) 6월9일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을 때 대원군이 사태수습의 책임을 맡게 되어 운현궁이 다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나 청국의 개입으로 정세는 역전 되어 대원군은 청국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대원군은 고종22년(1885)에 다시 운현궁으로 돌아왔으나 이때는 민비의 정치적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며 대원군은 운현궁 안에서 감시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후 을미사변 때에도 대원군이 일본인들에 업혀 경복궁으로 들어갔으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대원군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되고 만다.
광무2년(1898) 봄에 대원군과 민씨가 연달아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나자 고종은 이곳에 예장청을 설치하고 궁안에 대원군의 사우(祠宇)를 건립하였다.
대원군의 사후에는 흥친왕의 아들인 이준(李埈)이 승계하였고 1917년에는 의친왕의 2남인 이우가 승계하였다.
지금의 운현궁은 그 대부분의 부지를 학교법인 덕성학원이 사용하고 있으며 그 일부는 또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다.
-서울정도 600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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