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 시 :
3. 산 행코스 : 지하철5호선 광화문역-서울역사박물관-월암공원-인왕산-청운공원-윤동주시인의 언덕-창의문(북소문) (서울성곽돌기 청운지구)
4. 누구 랑 : 나홀로
인왕산은 높이 338.2m이며,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암반이 유난히 노출된 것이 특징이다. 인왕산은 서울 내사산(內四山)의 서쪽 호랑이산에 해당된다.
경복궁의 주산 북악이 뾰족하고, 그 안산(案山)인 남산은 능선이 매우 부드럽고, 좌청룡인 동쪽의 낙산은 밋밋하고 얕은 지세인데 비해, 우백호인 서쪽의 인왕산은 높고
우람하다. 인왕산의 주봉은 둥글넓적하면서도 남산같이 부드럽거나 단조롭지 않다. 또한 뾰족한 북악처럼 유달리 뛰어나지는 않으나 늠름한 남성적인 산세이다.
인왕산의 이름은 광해군일기 8년(1613) 3월 24일조에 "인왕은 부처님 중에서도 아름다운 부처님이다. 이 산에 옛날 인왕사(仁王寺)가 있었기에 인왕산이라 불리었다"라고 하였듯이, 그 산에 인왕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인왕산은 백악의 서쪽에 있어 조선초 태조·세종년간에는 서봉(西峰)·서산(西山)이라 부르던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仁王山'과 '仁王寺'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어, 성종 12년(1481)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기 이전에 인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왕은 불법의 수호신으로 사문(寺門) 또는 수미단 전면의 좌우에 안치하는 한 쌍의 금강역사로서, 둘 다 용맹하고 험악한 얼굴을 가지며 일명 이왕(二王) 또는 금강신(金剛神)이라 한다. 이렇듯 인왕산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산으로 세종의 내불당(內佛堂)이 이곳에 있었고, 인왕사 서쪽에는 금강굴이 있었으며, 또 세조 때에는 복세암(福世庵)을 짓기도 하였다.
세종 때 기록을 보면 인왕사가 있던 골짜기는 '인왕동'이라 불렀는데, 이는 인왕사동에서 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왕산 아래 골짜기 물 흐르는 곳을 일컫는 옥류동(王流洞)과 합쳐져 후에 옥인동(玉仁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이렇게 인왕산과 인왕동 이름의 유래가 된 인왕사는 태조와 성종 때의 기록에도 종종 등장하며, 연산군 때는 인왕사 복세암과 금강굴이 경복궁을 내려 누르고 있으므로 근방의 민가와 함께 철거토록 했다는 기사로 보아 적어도 연산군 때까지는 존속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인왕산은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주산인 북악의 서쪽에 있어 우백호에 해당함으로써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따라서 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수축할 당시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서쪽 성곽이 축조되었다. 그런데 한양 정도 당시 북악 주산론에 대응하여 인왕산 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 주목되었다.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태조께서 임금이 된 뒤 (중략) 도읍을 어디에 정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무학이 점을 쳐서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삼으라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이르기를 옛적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으로 향하였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무학은 '지금 내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한편 『한경지략』에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
무학이 200년 뒤라 한 것은 곧 임진년(1592)을 가리킨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무너지고 깨지고 불탔으니 참으로 용케 맞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왕산 주산론은 『태조실록』에는 보이지 않아 그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으나, 인왕산 서편 선바위 전설과 더불어 국초에 불교 세력과 성리학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도읍을 건설할 때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인왕산 기슭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사직단을 건설하니 나라의 상징이 인왕산의 품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세종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은 인왕산 동북 기슭에 무계정사를 마련하여 풍류를 즐기며 조정의 일을 살피기도 하였다.
인왕동은 도성 안에 경치 좋기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조선 후기의 화가인 정선(鄭敾)은 비 온 뒤의 인왕산 경치를 지금의 효자동 방면에서 보고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국보 제216호)」로, 강희언(姜熙彦)은 자하문 근처인 도화동에서 보고 느낀 「인왕산도(仁王山圖)」로 각각 그 아름다운 경치를 실감나게 표현하여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표작으로 남기도 하였다.
따라서 인왕동 뿐 아니라 이 산 기슭 곳곳에는 이름난 인물들과 깊은 인연이 얽힌 곳이 적지 않게 흩어져 있다. 지금 청운초등학교 뒷골목 안쪽의 깊은 골짜기는 백운동(白雲洞)으로 이름있던 곳이었다. 그 아래는 김상용의 집이 있던 청풍계(淸風溪)였으며, 그 근방에 세심대(洗心臺)가 있어 임금도 찾아 구경하던 곳이었다. 청풍계 청하동(淸霞洞)에서 고개 너머 남쪽은 김수항의 별장이 있었고, 그의 아들 김창업이 살던 옥류동(玉流洞)이 있었다.
그 울 안은 송석원(松石園)이라고도 했는데 평민 시인 천수경(千壽慶)이 거닐며 독서하던 곳이다. 송석원에서 서남쪽 지금의 누상동에는 북촌 제1의 활터 백호정(白虎亭)이 있었고, 고개 너머 지금의 배화여자고등학교 경내 일부는 이항복의 옛 집터 필운대(弼雲臺)이다. 또 사직단 남쪽(사직동 262번지)에는 선조가 태어나 자란 도정궁(都正宮)이 자리하였다.
한편 도성의 유적은 일제의 의도적인 파괴와 광복 후의 정치적 혼란과 행정의 공백기를 틈타서 성곽 파손이 계속되어 그 일부가 잔존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1968년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을 계기로 안보상 인왕산의 방위체제가 문제되어, 인왕산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정부에서는 가능한 범위내에서 도성을 원형대로 복원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문화유산의 복원과 아울러 국가안보의 정신적인 기반을 마련하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 1975년부터 도성복원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 때 인왕산 지역은 청운지구로 정해져 공사가 진행되었다. 1993년에 이르러 20여년간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던 인왕산이 새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1번출구)에서 내려 사직공원쪽에서 인왕산입구로 올라오는 것이 정코스인가 본데 저는 광화문역에서 내려 초행길에 인왕산 입구 찾느라 좀 헤맸습니다.
지하철5호선 광화문역에서 하차, 1번출구로 나오셔서 서울역사박물관을 지나 강북삼성병원에서 우회전하여 올라가시면 홍난파 가옥 가는길 안내판이 보입니다.
홍난파 가옥 가는길로 올라가시면 공원이 나오고 성곽이 보이는데 여기서 조금 더 동네길을 꼬불 꼬불 올라가니 성곽이 다시 보이고 인왕산입구가 나옵니다.
인왕산 입구
선(禪)바위.
남릉 하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왕산의 바위 중 으뜸으로 꼽히는 바위이다.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다 하여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 불렀다 한다.
인왕산 정상부
인왕산 정상 삿갓바위에서. 정상표지석도 없지만 그래도 여기가 정상이라니 또 인증샷 한장 남기고..^^
기차바위.
정상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위 이름 그대로 기관차가 객차를 이끌고 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바위는 홍제동 환희사 쪽에서 보면 제대로 볼 수 있다 한다.
기차바위 보고 다시 이리 돌아와 창의문으로 하산합니다.
하산해 보니 이런 곳으로 나오는군요. 창의문으로 가려면 여기서 도로를 따라 가야합니다.
서울성곽 일주하시는 분들인 듯 싶습니다
창의문 안내소 가는 길
창의문
창의문 지나 여기에서 계단을 올라 다시 성곽길을 따라 가면 북악산, 성북동 와룡공원까지 연결된다고 합니다. 저는 일이 있어서 여기서 경복궁역으로 하산했습니다.
<서울성곽 관광안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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