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어요

(서울) 삼각산 진관사

풍요한 2012. 9. 15. 23:11

2012/09/08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 동쪽의 불암사, 서쪽의 진관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다.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신라 진덕여왕 때(647-654) 원효(元曉)가 삼천사(三天寺)와 함께 창건한 신혈사(神穴寺)의 전신으로, 1011년에 현종이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진관사 설화>

고려 제5대 임금 경종이 승하하자 자매 왕비였던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20대의 꽃 같은 젊은 나이에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뛰어난 미모와 정결한 성격으로 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던 헌정왕후는 성안(개경) 10대 사찰의 하나인 왕륜사 별궁으로 거처를 옮겨 관음기도를 하면서 허전한 마음을 달랬다. 부처님께 의지하여 살아오기 어느덧 10. 헌정왕후는 어느 날 불현듯 자신의 분신인 아들이나 딸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이 무슨 망상인가. 아니야, 양자라도 하나 들일까.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맴돌던 어느 날 밤, 헌정왕후는 송악산에 올라가 소변을 보는데 온 장안이 소변으로 인해 홍수가 지는 꿈을 꾸었다. 하도 이상하여 복술가를 찾아가 물었다. 왕비의 말을 다들은 복술가는 얼른 일어나 아홉 번 절을 하더니 말했다.

『매우 길몽입니다. 아기를 낳으면 나라를 통치할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나는 홀로 사는 몸인데 그 무슨 망발인가.

『아니옵니다. 이는 천지신명의 뜻이오니 거룩한 아드님을 낳을 징조입니다.

『그런 말 두번 다시 입 밖에 내지도 말게나.

 

그 무렵, 경종의 숙부이자 헌정왕후의 숙부인(고려왕실의 친족혼 풍습 때문임) 안종은 집 가까이 절에서 홀로 지내는 헌정왕후에게 간혹 선물을 보내는가 하면 집으로 초대하여 위로하곤 했다. 숙부의 친절에 감사하던 헌정왕후도 존경하는 마음에 호의를 품게 되어 손수 수놓은 비단병풍을 답례 선물로 보냈다. 이러는 동안 두 사람은 정을 나누게 됐고 헌정왕후는 홀몸이 아니게 되었다.

 

헌정왕후는 걱정 끝에 안종을 찾아가 송악산에서 소변 보던 꿈과 아기를 가질 무렵 관세음보살께서 맑은 구슬을 주시던 꿈 이야기를 하면서 멀리 섬으로 도망가 아기를 낳겠다고 상의했다.

『내 어찌 왕후를 멀리 보내고 살 수 있겠소. 더욱이 아기는 어떻게 하고….

이런 이야기를 엿들은 안종의 부인은 두 사람을 괘씸히 생각하여 안종의 방 앞에 섶나무를 쌓고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해 소문이 퍼지게 되고 이 사실을 안 성종(헌정·헌애왕후의 친오빠)은 안종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이 소식을 들은 헌정왕후는 그 자리에서 실신하여 가마에 실려오다 산기가 있어 그날 밤 옥동자를 분만하니 그가 바로 후일의 현종이다. 헌정왕후는 아기를 분만하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한편 헌애왕후는 두살된 왕자 송을 기르면서 별궁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본래 성품이 포악하고 음탕하여 동생 헌정왕후를 시기 질투하던 그녀는 외간 남자들에게 눈을 돌리던 차 간교하기로 소문난 외사촌 김치양과 정을 통하게 됐다. 왕자 송이 18세 되던 해에 성종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송이 이으니 그가 바로 목종이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헌애왕후는 정사를 돌보면서 천추전에 거처하니 「천추태후」라 불리었다.

태후와 놀아나던 김치양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호화로움을 누리면서 부정을 저질렀다. 목종은 김치양을 내쫓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마음이 상할까 염려하여 실행치 못했다. 어느 날 태후는 거리낌없이 김치양의 아기를 낳고는 장차 왕위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태후는 김치양과 모의하여 헌정왕후가 낳은 대량원군 순을 궁중에서 내쫓기로 했다. 이때 순의 나이는 12세였다.

 

이에 백모 태후가 시기하는 눈치를 채고 번화로운 궁중을 떠나 절에 가서 수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궁중에 들어와 설법하는 스님을 따라 개경 남쪽에 있는 숭교사에 가서 머리를 깎고 입산출가했다. 대량군 스님이 남달리 총명하여 10년 공부를 3년에 마쳤다는 소문이 나돌자 태후는 늘 감시를 늦추지 않고 자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직감 있는 스님의 경계로 여러 차례 화를 면한 대량군은 그곳을 떠나 삼각산의 조그만 암자로 들어갔다. 암자의 노스님 진관대사는 대량군이 읊은 시 한 수를 듣는 순간 그가 용상에 오를 큰 인물임을 알았다. 대량군의 행방을 뒤쫓던 태후는 마침내 삼각산 암자에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대량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침대를 놓아 대량군을 기거케 했다. 대량군이 3년간의 땅굴생활을 하는 동안 조정은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웠다. 왕은 궁중이 어수선하여 심장병에 걸렸고, 이 틈을 타서 김치양은 역적을 모의했다. 그러나 강조가 먼저 변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군을 새 임금으로 모시게 되었다.

 

대량군 나이 18세 되던 어느 날.

『새 임금 맞이하니 신천지 열리고 새 일월이 밝아오네.

36각의 풍악소리가 울리면서 오색 깃발이 하늘을 뒤덮는 가운데 금·은·칠보로 장식된 8인교 가마가 산문 밖에 멈췄다. 스님들은 정중하게 행차를 맞이했다.

『대량군 마마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특명대사 김응인과 황보 유의는 진관대사에게 예를 올리고 찾아온 뜻을 말한 후 대군의 별당 앞에 국궁재배했다.

『대군마마! 대위를 이으시라는 어명을 받잡고 모시러 왔사옵니다.

『내 운명 기박하여 세상을 등진 몸, 일생을 조용히 보낼 것이니 어서 물러들 가시오.

 

하지만 대량군은 거듭 간청하는 특사의 뜻과 진관대사의 권유에 땅굴에서 나와 대궐로 향했다.

대군은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이라 하고 절이름을 신혈사라 바꾸기를 청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자신의 심기를 달래며 거닐던 신혈사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명했다.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됐다.

 

<Source: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

 

 

삼각산 진관사 일주문

 극락교와 해탈문

 해탈문

6.25사변으로 폐허가 사찰을 현재 주지인 진관스님이 복구하여 도량의 모습은 찾을 없지만, 정돈된 가람과 고즈넉한 산사에서 왠지 모를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가람은 일주문을 지나 돌담길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데, 돌담과 맞닿은 홍제루가 누각이면서, 천왕문의 구실을 한다. 경내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홍제루 아래를 지나야 하는데, 홍제루를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정말 정돈된 정갈한 가람이 한눈에 들어 온다.

 

 

홍제루.

진관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 초입에 있는 누각으로 정면 3, 측면 2칸의 중층건물이다. 1977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으로, 건물 1층은 석주를 세워 기둥을 떠받치고 있다.

절을 진입하는 출입구로 경내에 들어서려면 누각아래의 중앙 계단통로를 이용해야 하는데, 건물 1층은 석주를 세워 하부구조가 드러나 있으며, 석주에는「대종대시주비」가 새겨져 있어 조선후기 진관사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이외 석주 좌우로는 목조로 만든 출입구가 있으며, 출입구에는 사천왕문을 대신한듯 인왕상이 단청되어 있다.

이외 2층은 현재 강당으로 사용되는데,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아 사찰을 참배하고 집회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으며, 외부는 계자난간을 둘러 진관사를 찾는 참배객들의 휴식처로도 사용되고 있다.

 대웅전

나가원.

대웅전 우측에 있는 정면 7,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로, 1972년에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이다.

건물은 콘크리트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으로, 건물전면 3칸에 툇마루를 두어 요사채의 모습을 보여준다.

건물 외부는 요사채이지만 동자도와 화훼도 같은 단청이 칠해져 단정한 멋이 느껴지며, 어칸에는 현판을 비롯하여 주련 8기가 걸려 있다.

건물 내부는 정면 3칸은 대중방으로, 그리고 좌우 2칸은 요사채와 종무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중방에는 1973년에 조성된 아미타후불홍탱과 석조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